대륙의기상/열도의문화
| ※ 비고 본 게시물에는 그 주제의 특성상 다소 건전하지 못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 시 주의를 요하나, 그 역시 엄연한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므로 운영진의 임의 수정이나 삭제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
시민 논객입니다.
오랜만에 잠깐 시간이 나서 이렇게 게시물을 올리게 되었네요.
저번에 올렸던 졸고는 조회수가 무려 7500에 이르는 영광을 안아 기쁩니다.
물론 회원 여러분들의 따뜻한 격려도 감사하지만
게시물의 내용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추가 탐색을 하던 중
정응수 씨의 <조선 유학자가 본 일본의 성문화>,
정일성 씨의 <이토 히로부미>라는 좋은 자료를 접해
그 내용을 정리, 덧붙였습니다.
그럼, 이하 원고입니다.
| § 서론ㅡ왜 한국인은 일본의 성문화사를 탐구하는가 |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문화에 있어 "성(性, sex)"이란
이미 독자적인 연구 분야로 인정받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 때는 천상과 하나가 되는 중요한 토속 의식으로서,
또 한 때는 남녀노소가 즐기는 쾌락의 청량제로서 성은 꾸준히 주목받아왔다.
물론 섹스 어필은 그야말로 "원초적 본능"이기에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곧잘 발견되는 것이지만,
일본인들의 이불 아래 이야기는 그를 넘어선 독특한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일본 혐한 네티즌들의 무차별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 한국인들로서는
그들의 주요 공격 수단인 "성적 조롱"에 대응하기 위해 확실한 지피지기의 논리를 구축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한국 논단에서는
"한국은 치한과 변태가 창궐하는 강간 대국이다"
"한국녀는 종군 위안부 사태에서 알 수 있듯 성욕에 굶주려 있는 섹스 애니멀이다"
"한국인에게는 올바른 성관념을 일본이 다시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된다"
와 같은 왜곡된 주장을 논파하는 데에 주력해 왔다면,
본 게시물은 한 단계 진보하여 그들의 사정을 일목 요연하게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 ※ 비고 본 게시물은 학계의 통상적인 관행에 따라 일본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상대(上代) : 기록 이전의 선사시대 ▼ 고대(古代) : ㉠ 아스카 시대(6세기 후반~7세기 전반) ㉡ 하쿠호 시대(7세기 후반~8세기 초기) ㉢ 텐표오 시대(대체로 8세기) ㉣ 헤이안 시대(8세기 말엽~12세기) ▼ 중세(中世) : ㉠ 가마쿠라 시대(12세기 말엽~14세기 전반) ㉡ 무로마치 시대(14세기 전반~16세기 후반) ▼ 근세(近世) : ㉠ 아츠지, 모모야마 시대( 16세기) ㉡ 에도시대(17~19세기 중엽) ▼ 근대(近代) 이후 : 메이지 시대(19세기 중엽)~현재 |
| § 상대ㅡ성문화 태동의 서막 |
원시 상태의 일본인에 있어 대자연은 상당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천둥과 번개, 가뭄과 홍수 등 자연 현상은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재앙이었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강한 힘"을 숭상하는 원시 신앙 체계를 창시하게 된다.
오곡 백과를 영글게 하고 생명을 잉태하며
나아가 부족을 영속시키는 본능적인 힘ㅡ
인간이 지닌 그것은 다름 아닌 성욕이었다.
그에 따라 성기 숭배는 일본의 선사시대를 넘어 상당한 지속성을 갖게 된 것이다.
성기는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신성시되며,
성행위는 나아가 하늘과 땅이 결합하고 만물이 생성되는 신의 섭리로 존중받았다.
한국의 「삼국사기」정도에 해당되는 일본 최고(最古)의 관찬 역사서 「일본서기」의 일부를 보자.
| 因問陰神曰。汝身有何成耶。對曰。吾身有一雌元之處。陽神曰。吾身亦有雄元之處。 思欲以吾身元處合汝身之元處。於是。 陰陽始遘合爲夫婦 。 고로 (양신이) 음신에게 물었다. "너의 몸에는 무엇이 있느냐?" (음신이) 대답하여 말하길 "나의 몸에는 암컷의 근원이 되는 곳(음부)가 있노라." 양신이 말하기를 "나의 몸에도 역시 수컷의 근원이 되는 곳(남근)이 있노라. 생각컨대 나의 근원과 너의 근원을 합하고 싶구나." 이에 음신과 양신이 (그곳을) 합하여 부부가 되었다. -일본서기 권일 제 사단 중 일부- |
성기 숭배는 더욱 영역을 넓혀
미술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당시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토기 인형들은 유난히 성기가 강조되어 있다.
이와 같은 두 분야의 동거는 현대의 일본에까지도 이어지는 주요한 발자취라 하겠다.
| § 고대ㅡ귀족의 유희로 발전한 성문화 |
상대가 그러했듯 여전히 성문화의 종교화는 면밀히 이어지고 있었다.
샤먼들은 하늘과 인간을 성적으로 매개하는 섹슈얼 미디어(sexual media)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신을 대하는 자와의 성교는 곧 죄악을 씻고 복을 얻는 것이라는 믿음에까지 이어졌다.
일본 각지의 풍속과 유래를 그린 다음 문헌을 보자.
| [萩原里] …(중략)…米舂女等陰。陪従婚断。故云陰絶田。…(후략)… [하기하라노사토(萩原里)] …(중략)…요네츠키메들(米舂女ㅡ신에게 바칠 술과 음식을 만드는 신녀의 일종)의 음부를 (신공황후의) 시종들이 성교를 해서 찢어버렸다. 그래서 (그 지명을) "호토타치타(陰絶田)"라 한다. -파마국 풍토기 이보군- |
당시 시종들은 소위 "한반도 남부 지배설"로 유명한 신공황후를 모시고
뱃길로 여행하던 도중 어느 마을에 정박하여 일을 벌였는데,
현대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출장중인 국가 원수의 수행원들이 종교인들과 성관계를 가지며,
그것을 굳이 지명의 유래로 삼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바로 상단에서 언급한 성 숭배 사상의 연장선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회가 발달하고 귀족 중심의 계급 시스템이 형성되면서
성문화는 일본인에게 유희적 목적으로도 보급된다.
다음은 당시 귀족과 평민들의 노래를 모은 가곡집 「만엽집」의 일부이다.
| 伊香保ろの やさかのゐでに 立つ虹の 現はろまでもさ 寝をさ寝てば…(후략)… 이카호의 커다란 방죽 위에 솟은 무지개처럼 모두가 보도록 함께 잘 수 있다면…(후략)… ㅡ만엽집 14권ㅡ |
| § 중세ㅡ청년들과 승려들의 한을 풀다 |
이 시대에는 크게 두 가지의 성문화가 생성된다.
하나는 촌락의 청년들이 주도하였던 촌락 단위의 난교 풍습인 "요바이(夜這い)"였고,
다른 하나는 "대처승 제도"라는, 승려들의 혼인 제도이다.
가. 요바이(夜這い)
요바이는 "밤[夜]에 기어가다[這い]"는 의미인데,
말 그대로 특정일의 심야에 청년들이 떼를 지어 벌이는 성교 파티이다.
요바이 당일에는 저잣거리에도 춘화(春畵)가 걸리고 갖가지 성상품을 파는데,
기분이 들뜬 청년들은 마을 처녀들의 집으로 향해 그곳에서 죄책감없이 간음을 한다.
물론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망측함이 적지 않으나,
당시에는 오히려 요바이의 경험이 없는 여자는 인기가 없는 것으로 멸시해,
부모가 오히려 청년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러한 풍속은 정부의 뒤늦은 단속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20세기에까지 이어져 왔다.
나. 대처승 제도
대처승 제도란 승려의 자유로운 혼인을 인정하는 제도인데,
일제시대의 영향으로 한국에까지 유입되어
대한불교 태고종에서도 승인받았다.
당시 일본에는 친란(親鸞)이라는 승려가 살았는데,
일화에 따르면 그가 수도를 하던 중 문득 끓어오르는 성욕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보살이 현몽(顯夢)하여 말하길
"너, 여자를 범하고 싶지? 내가 대신 여자로 변하여 너에게 갈테니
나를 아내로 맞으면 극락 왕생할 것이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물론 예언대로 극락 왕생 했는지는 미지수지만)
일본 내에서 상당한 교세를 떨치게 되었고
"정토진종(淨土眞宗)"이라는 일본 내 최대 불교 종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과거 고대가 그러했듯,
그 후로 사찰의 비구니들은 대중을 위한 창녀의 역할도 겸하였으며,
"여승을 범하면 극락에 간다"는 믿음 또한 자리를 굳혀갔다.
또한 남승 역시도 남색(男色)의 대상이 되어 성문화의 발전을 이끌었는데,
이는 일본의 전통 소설인 「아키노요나가 모노가타리(秋夜長物語)」등의 소재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 § 근세ㅡ일본 성문화의 절정기 |
시대는 바야흐로 16세기,
도요토미 일족이 내전중인 일본을 통일하고 도쿠가와 일족이 바통을 이어받으며
일본은 수도인 에도(江戶ㅡ지금의 東京)를 중심으로 문물이 번성하였다.
이 시기의 성문화는 크게 두 조건을 전제로 하는데,
하나는 막부(幕府ㅡ일본에 전통적으로 존재해왔던 실권 군사 정부)의 공인과 제도적 뒷받침이었고,
또 하나는 그 문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발전시킨 민간의 호응이었다.
가. 관(官)의 역할
사실 근세 이전에는 유곽이 개인 차원에서 무허가로 운영되고 있었으나,
1598년 하라 사부로자에몬(原三郞左衛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공인 아래
교토(京都)에 최초의 공창을 설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공창의 열풍은 하나의 집창촌(集娼村)이 들어설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에도(江戶)와 오사카(大阪) 등의 대도시로 무섭게 번져 나갔다.
앞서 말한 남색의 경우 사무라이 계급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어,
이하라 사이가쿠(井原西鶴)라는 문필가는 아예 「난쇼쿠 오오카가미(男色大鑑)」라는 작품을 낼 정도였다.
특히 막부의 3대 장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는 그 자신이 남색 애호가였다고 전해진다.
나. 민(民)의 호응
지도층의 유연한 조치에 백성들이라고 엄격했을까.
18세기 일본에 조선통신사 제술관으로 파견되었던 신유한의 「해유록(海遊錄)」은
그 실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 집집마다 꼭 욕실이 있는데 남녀가 함께 벗고 목욕한다. 대낮에는 서로 정사하고 밤에는 불을 켜 정사한다. ○ 왜인들은 자신의 처에 대해서는 질투하지 않지만, 남창에게만큼은 질투하여 사람을 죽이는 자까지 있을 정도다. ○ 풍요, 습속이라면 추하여서 기록할 만한 것이 없었다. 간간이 관에 있는 통역의 말을 들어 소위 청루 기생들의 외설한 모든 형상들을 알게 되니 심히 추하여 입에 담지 못할 정도다. ○ 결혼에는 동성(同性)을 피하지 않고 사촌남매끼리 서로 혼인하며, 형수와 동생의 아내가 과부가 되면 또한 데리고 살아, 그 음탕하고 더러운 행실이 곧 금수와 같다. |
이와 같은 민간의 요구에 따라 예술, 출판계도 큰 반향을 보여,
남녀간의 수간 장면등을 다룬 우키요에(浮世繪) 등도 널리 제작되었다.
또한 「難波物語」나 「色道大鏡」등의 집창촌 유녀 안내서도 수십종 출판되었다.
| § 근대 이후ㅡ본격적인 성적 규제, 그러나… |
메이지 시대 이후 근대화에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일본 정부는
전국에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보급하고 성문화 단속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실효성이 상당히 미미했으며
메이지 정부의 고관들 역시 수천년 전통의 자유로운 성규범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메이지 헌법의 작성자이며, 수상직을 네번이나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노년의 열정을 주체하지 못한 호색한이었다는 점이다.
실제 그는 22살에 이리에 스미코라는 여성을 아내로 맞았지만,
요정 기생과 놀아나며 이혼 전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집에 들어간 것은 단 하룻밤 뿐이었다.
이토는 도쿄, 오사카, 시나가와(品川), 기온(祇園), 고베(神戶)등 각지에서 10대, 20대의 젊은 기생을 데려다 범하고
한 번 살을 부빈 기생은 깨끗하게 갈아치워 원한을 사는 일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유별난 엽기 행각은 당시에도 화제를 불러 일으켰는데,
특히 구로이시 루이코(黑岩淚香)가 창간한 <요로즈츠호(萬朝報)>는
1899년 <축첩의 실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대훈위 후작 이토 히로부미의 엽색담은 너무나 진기하여 세상에 알려진 사실도 많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아마도 신기한 일 중에 가장 기이한 사건이며 비밀 가운데 일급 비밀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도쿄 아자부(麻布)의 어느 화려한 저택에 한 처녀가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이토와 같은 동네에 사는 한 토목 청부업자의 큰딸로 아버지에게 집을 선물받은 것이다. 이토는 이 집에 드나들며 그녀와 밤을 즐겼다. 그러나 그녀가 1864년 갑자기 죽다 이토는 그 동생이 들어와 살게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둘째도 올해(1899년) 열아홉 살의 꽃다운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토는 그 아래 열여섯 살 난 여동생을 손에 넣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에게 딸을 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둘이나 요절했는데 이번만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또 동생도 두려워 싫어했다고 한다. |
아마 그 문제의 "병"이란 성병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가 내각 총리에 취임중이던 1888년, 드디어 문제의 "가장무도회 사건"이 터진다.
외무경 이노우에는 선진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일본의 발전상을 과시할 목적으로
도쿄 고지초(麴町) 옛 사쓰마번(薩摩藩) 자리에 "로쿠메이칸(鹿鳴館)"이라는 연회장을 세웠는데,
당시로서는 거액인 18만엔을 동원하고 영국인 건축가 조지프 콘도르를 초청해 완공한 초호화 건물이었다.
이곳에서는 날마다 무도회가 끊이지 않았고, 그 가운데서도 1888년 4월 20일 밤
이토 내각총리 부부가 주최한 가장무도회는 아주 호화스러웠다.
그런데 이토는 평소의 그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날 밤 연회에 참석한 백작 도다 우지타카(戶田氏共)의 부인인
기와코(極子)를 몰래 정원 숲으로 유인하여 범하고 말았다.
도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스위스 공사 등을 역임한 인물로
1882년 이토의 유럽 출장 중에 수행원으로 참여한 전력이 있었는데,
이토의 행동은 그러한 최소한의 인연과 윤리마저도 저버린 행동이었다.
전후사정을 파악한 언론에서는 연일 그를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인물’로 몰아붙였고
요시마츠 주타로(吉松壽太郞)와 사노 기이치(佐野義一) 등 고치현(高知縣) 청년들은
실제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변절자의 밀고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성적 취향은 조선 통감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계속되어,
차가운 통감부 관사의 다다미 바닥을 조선 하녀들의 몸으로 데우며
일본에서 데려온 고유라는 유녀와 뜨거운 밤을 보내곤 했다.
가끔 도쿄의 젊은 기생들이 그리우면 직접 출장을 가서 즐겼는데,
그의 재임 기간 3년 동안 출장 횟수는 총 13회에 이르며,
한 번 갈 때마다 보통 1개월 이상을 머물렀다고 한다.
| § 결론 ㅡ 왜 일본의 성문화사는 유독 자극적인가 |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을 보고 있으면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문화는 타국에 견주어 볼 때 그 선정성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비록 성욕은 만국 공통의 생리적 본능이라고는 하나,
통상은 나름대로의 절제 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추론해보면 다음과 같다.
A,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없다.
ㅡ 한국이나 중국 등에서는 유교나 불교 윤리가 욕정의 통제 기능을 담당하였지만,
정신문화의 발달 수준이 낮은 일본에서는 사회적인 의식 자체가 부족했다.
당시 불교는 소수 승려들과 무사 계급 정도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해 대중과는 거리가 있었고,
성리학은 일부 문인 계층에서만 약간 연구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B, 한 때 인구의 증식을 목표로 했던 때가 있었다.
ㅡ 사실 여부에는 보다 자세한 후속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이나,
실제 일본에서는 잦은 내전으로 남성들의 씨가 마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내전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면서 일본 정부는 개인의 성관계에 대해 너그러운 입장을 취했고,
인구 증가의 목적을 위해 행해지던 것이 이후에는 유희의 목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이다.
2009.07.02 18:36:40
전혀 그렇지 않다. 성문화 마저도 한국에서 이미 예전부터 동성을 가리지 않는등 상당히 활발했다.
일본은 뭐든지 조금 몇백년 늦게 받아들이다가 서양물 갑자기 먹고 커진 죄밖에 없지. 뭐. 몇백년 늦추어져 있는 멍청한 머리로
제국주의 받아들이니까 전쟁일으킬수밖에.
걍 냅둬. 우리는 지금 역사서도 다 사라지고 유추밖에 못하는 이시점에서 일본이 어떻다 중국이 어떻다 따질수 없어.
일본은 뭐든지 조금 몇백년 늦게 받아들이다가 서양물 갑자기 먹고 커진 죄밖에 없지. 뭐. 몇백년 늦추어져 있는 멍청한 머리로
제국주의 받아들이니까 전쟁일으킬수밖에.
걍 냅둬. 우리는 지금 역사서도 다 사라지고 유추밖에 못하는 이시점에서 일본이 어떻다 중국이 어떻다 따질수 없어.
2009.07.02 18:51:08 222 * 235 *
no.999// 지적 감사합니다.
사실 말씀하신 "한국의 성문화"에 대해서는 정응수 씨의 자료에서도 일부 언급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양쪽의 자료를 객관적으로 검토해볼 때,
일본의 성문화는 그 자극성과 선정성에 있어 한국의 것을 압도하는 수준이었지요.
가령 한국에서 춘화라면 남녀가 서로 부둥켜 안는 수준의 그림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음모 하나까지 세세하게 묘사되어 적나라한 관계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실 본문에서는 미처 언급하지 못했지만
성 소재의 문학 작품도 차마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또한 공창 역시도 한국의 관기 체계를 능가하여
1670년에는 오사카 한 도시에만 무려 2200명의 창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말씀대로 한국의 사료가 부족하고, 일본의 정신 발달이 늦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일본의 성문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자격이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앞으로도 날카로운 지적 부탁드립니다.
사실 말씀하신 "한국의 성문화"에 대해서는 정응수 씨의 자료에서도 일부 언급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양쪽의 자료를 객관적으로 검토해볼 때,
일본의 성문화는 그 자극성과 선정성에 있어 한국의 것을 압도하는 수준이었지요.
가령 한국에서 춘화라면 남녀가 서로 부둥켜 안는 수준의 그림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음모 하나까지 세세하게 묘사되어 적나라한 관계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실 본문에서는 미처 언급하지 못했지만
성 소재의 문학 작품도 차마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또한 공창 역시도 한국의 관기 체계를 능가하여
1670년에는 오사카 한 도시에만 무려 2200명의 창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말씀대로 한국의 사료가 부족하고, 일본의 정신 발달이 늦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일본의 성문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자격이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앞으로도 날카로운 지적 부탁드립니다.
2009.07.02 20:07:59 59 * 33 *
왜그래 일본 포르노 보면 이런거 작성안해도 다 알면서... 일본av다 뭐다 하는데 개뿔 포르노 단어를 좀 중화 시킨거지
그냥 일본포르노라고 하자 성인비디오는(av) 이건 대략 그냥 울나라 비됴방에 있는 수준이 av이고
그냥 일본포르노라고 하자 성인비디오는(av) 이건 대략 그냥 울나라 비됴방에 있는 수준이 av이고
2009.07.03 02:24:19 59 * 220 *
한국이나 중국 등에서는 유교나 불교 윤리가 욕정의 통제 기능을 담당하였지만,
정신문화의 발달 수준이 낮은 일본에서는 사회적인 의식 자체가 부족했다.
==============================================================
이 문장 하나가 쪽발이의 저급한 성문화의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정신문화의 발달 수준이 낮은 일본에서는 사회적인 의식 자체가 부족했다.
==============================================================
이 문장 하나가 쪽발이의 저급한 성문화의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2009.07.03 04:51:47 118 * 47 *
우리나라는 여자 엉덩이만 만져도 성범죄가 되는데
왜나라는 여자의 옷을 찢고 강간삽입 정도는 해줘야 성범죄가 될 듯...
한국이 성범죄율이 높다면 그 중 상당수는 지하철에서 엉덩이 만지는 정도가 포함되는데
왜나라 애들 생각에는 성범죄다 그러니까 죄다 여자를 패서 강간을 한 줄 아는거나 아닌지...
왜나라는 여자의 옷을 찢고 강간삽입 정도는 해줘야 성범죄가 될 듯...
한국이 성범죄율이 높다면 그 중 상당수는 지하철에서 엉덩이 만지는 정도가 포함되는데
왜나라 애들 생각에는 성범죄다 그러니까 죄다 여자를 패서 강간을 한 줄 아는거나 아닌지...
2009.07.04 02:10:29 116 * 244 *
일본의 남색문화가 빠졌군요.
남색문화만 해도 리포트 5개는 쓸겁니다 진짜로..
뭐 일단 유명한 코쇼제도. 뭐 모리 란마루 라던가.. 하면서 미화하고 있지만.. 실체는 대머리 남정네 2인의 후X놀음이고..
치고제도. 승려의 성욕을 풀어주기 위해서 어린 소년들을 강X하는 제도...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시다 미츠나리도 치고 출신)
18C인가.. 조선통신사가 남색에 충격을 먹자.
당대의 국학의 대가이자, 유학자던.. 누구더라.. 어쩄든 "선생은 아직 그 재미를 모르십니까?" 하고 반문 등.....
남색문화만 해도 리포트 5개는 쓸겁니다 진짜로..
뭐 일단 유명한 코쇼제도. 뭐 모리 란마루 라던가.. 하면서 미화하고 있지만.. 실체는 대머리 남정네 2인의 후X놀음이고..
치고제도. 승려의 성욕을 풀어주기 위해서 어린 소년들을 강X하는 제도...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시다 미츠나리도 치고 출신)
18C인가.. 조선통신사가 남색에 충격을 먹자.
당대의 국학의 대가이자, 유학자던.. 누구더라.. 어쩄든 "선생은 아직 그 재미를 모르십니까?" 하고 반문 등.....
2009.07.04 12:10:44 222 * 235 *
일빠 나가// 정확하게 알고 계시네요.
사실 일본의 남색문화에 대해서라면 사료가 참 풍부한 편인데,
제가 일본어가 아직 초급인 관계로 자료 수집이 좀 서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조선 통신사"는 바로 제가 언급한 신유한 선생입니다.
역시 거론된 그의 저서 "해유록"은 그가 일본에 통역관을 데리고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것인데, 그 내용을 보고 있으면
현대의 한국인에게도 충격을 줄 만한 내용이 적지 않지요.
하루는 신유한 선생이 남색 문화에 대해 충격을 받고
당시 일본 성리학계의 거두이자 조선 유학파 외교 고문이었던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그가 대답하기를 "선생은 그 오묘한 재미를 모릅니다"라고 대꾸했다고 하네요.
일빠 나가님께서 언급하신 학자는 이 사람일 겁니다.
저도 인조이 재팬에서 6년간 경험을 쌓은 관계로
일본인의 주장을 논파하기 위해 일본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지만,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일빠 나가님과 같은 분께서 많은 도움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실 일본의 남색문화에 대해서라면 사료가 참 풍부한 편인데,
제가 일본어가 아직 초급인 관계로 자료 수집이 좀 서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조선 통신사"는 바로 제가 언급한 신유한 선생입니다.
역시 거론된 그의 저서 "해유록"은 그가 일본에 통역관을 데리고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것인데, 그 내용을 보고 있으면
현대의 한국인에게도 충격을 줄 만한 내용이 적지 않지요.
하루는 신유한 선생이 남색 문화에 대해 충격을 받고
당시 일본 성리학계의 거두이자 조선 유학파 외교 고문이었던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그가 대답하기를 "선생은 그 오묘한 재미를 모릅니다"라고 대꾸했다고 하네요.
일빠 나가님께서 언급하신 학자는 이 사람일 겁니다.
저도 인조이 재팬에서 6년간 경험을 쌓은 관계로
일본인의 주장을 논파하기 위해 일본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지만,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일빠 나가님과 같은 분께서 많은 도움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no.999










그나저나 현재 한국이 성범죄율이 높다는데
쪽바리들이 말하는것처럼 진짜 한국이 강간대국인지 알고 싶다
알고보면 쪽바리들 경찰이 무능하고 은폐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언급을 꺼리고 강간에 대해 신고하지 못하고
피해자에 대해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고 하던데
실제로는 쪽바리들도 분명 성범죄율이 낮지않다는것